『스윙키즈』, 탭댄스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기묘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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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키즈』, 탭댄스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기묘한 만남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5.01.20 1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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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네이버영화
▲자료제공=네이버영화

춤의 세계는 신비스럽다. 몸의 몰입에 관한 암시나 간접경험은 직접 먹지 않고 만나는 음식처럼 오히려 허기를 일으킬 뿐이다. 눈으로 머리로 코로 음식을 맛보는 것에 한계가 있듯이 춤은 온몸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춤의 세계는 보는 것만으로 스스로 열리지 않는다.

나는 기회가 있을 적마다 스스로 음치, 몸치임을 밝히곤 했었다. 음치는 노래를 못할 뿐, 즐기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그 즐김 역시 세상의 통념과 어긋날 뿐 자아도취의 경지를 수시로 경험하는 장점도 있다. 몸치는 다르다. 춤을 즐기는 순간 몸치의 경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이 경계를 벗어난 적이 있었음을 가물가물한 기억의 끈을 더듬어 본다.

2000년대 초반 굶기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단식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전라도 강진의 ‘다산초당’과 ‘남녘교회’가 멀지 않은 어느 폐교에서 함께했던 얼굴들이 또렷이 기억나지만, 그 이름은 생략하기로 하자. 김민회 목사님이 주관하는 모임이었고 단식하면서 요가와 산행, 영화감상과 명상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단식의 즐거움은 몸이 가벼워지고 영혼이 맑아지는 심리적 느낌과 독소가 빠지면서 실제 몸의 표정이 활발하며 다채로워진다는 점이다. 단식 3일 이후부터 몸에 민감해지는 새로운 체험에 눈뜨게 되었다. 그즈음 이종희 선생님을 만나서 명상춤을 추었다. 보름달은 아니었지만, 폐교 운동장에서 강강술래를 하듯이 원을 그려서 천천히 움직였다. 명상과 춤이 어우러진 몸짓은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으면서 달빛 조명으로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이종희 선생님은 개인 참여자이자 지휘자로서 우리를 이끌었을 뿐이다. 명상음악이 흐르기도 하고 침묵이 흐르기도 하면서 몸을 느끼는 것이 전부인 춤이다. 그때 처음으로 몸의 율동이 어색하지 않았고 순식간에 환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남들과 섞여서 분위기에 맞추어서 리듬을 타며 몸을 흔드는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 몸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 해방감 바로 그런 감정이었다.

춤의 신비는 내 몸에 새겨진 사연들을 풀어내는 것이다. 이야기함으로써 후련해지고 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로 문제를 풀어내듯이 말이다. 이야기나 문자로 풀어내는 사연과 몸으로 풀어내는 사연은 그 느낌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기록되지 않는, 머물지 않는, 순간의 호흡으로 토해내는 숨결처럼 편안하고 그만큼 격정적이었다. 처음이자 끝이며, 시작이자 마지막이며, 순간이자 영원이다. 멈춤이자 움직임이며, 몸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 세상도 나와 한 몸으로 순간정지가 이루어지는 절정의 희열이 있었다.

비록 몸치임에도 춤꾼들 옆에서 선망하던 시간조차 없었던 건 아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흠모의 정이 깊었었다. 연극반에서 배우던 탈춤 동작들은 얼마나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던가. 나와 달리 일취월장하여 온몸으로 열연하던 친구가 있었고 대학 모임에서 최고의 춤꾼이라고 인정했던 선배도 있었다. 머뭇거리면서도 그들 곁을 떠나지 않았었다.

영광의 어느 한옥에서 공옥진 선생님과 일주일을 함께 지내던 시간도 있었다. 공옥진 선생님은 정이 넘치는 분이라 말씀마다 눈물을 쏟았다. 당신을 찾아와 주었다는 것만으로 우리 일행은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당시 각설이타령 채록을 다니던 중이었다. 무대에서 마주하는 춤은 커다란 움직임이고 실루엣이다. 손동작과 몸놀림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말하자면 소설을 문체의 맛을 느끼면서 밑줄을 그으며 문장을 음미하는 것과 그냥 후루룩 국물을 들이마시듯이 줄거리를 대충 파악하는 것처럼 그 느낌이 천양지차였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춤꾼을 흠모하던 차에 이종희 선생님을 만나면서 몸의 흐름을 스스로 음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오래전 일이다. 당시는 춤바람이 나서 밤마다 혼자 스텝을 밟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명상춤을 배우기 위해 서울이나 광주 등 멀리 다닐 만큼의 열정은 없었다. 그렇게 잊힌 추억 속의 사진 한 장으로 남았을 뿐이지만 가끔 머리보다 몸이 먼저 그 기억을 되살린다. 댄스 영화를 만날 때마다 감각이 평균치를 웃도는 온도로 달아오른다. 이 영화 『스윙키즈』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스윙키즈’란 ‘재즈 음악을 하는 아이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한바탕 웃음과 신나는 재즈 음악으로 출발한다. 『써니』의 강형철 감독의 분위기가 물씬 배어있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인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폭동 사건을 배경으로 설정하여 무겁고 진한 이데올로기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전쟁, 포로수용소, 좌우 세력의 대립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예사롭지가 않다.

50년대 한국전쟁이 스치고 간 포로수용소에 울려 퍼지는 탭댄스의 경쾌함은 현실의 무거움과 부조화의 극치를 판타지로 담고 있다. 춤으로 표현하는 공감과 화합의 가능성을 잘 살렸지만, 후반부로 올수록 영화는 포로수용소라는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이성을 상실한 집단의 야만과 폭력성을 연출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폭동과 살인, 탈출 사건을 바탕에 깔고 본격적인 춤판을 이끌어간다.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맛나게 버무려서 시대적 흐름을 녹여내려 했으나 무거움과 가벼움의 만남은 기름과 물처럼 따로 놀았다. 결국, 영화는 시대물의 답변 의무를 배반할 수 없었나 보다. 유쾌 발랄 재미있고, 뭉클하게 인간이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묘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전쟁과 춤의 결합이 거슬리는 장면들도 있었으나, 좋은 장면들도 많았다. 인민군 포로와 국방군 포로의 만남을 춤으로 펼쳐내면서 웃고 울고 손뼉을 치게 되지만 현실의 문제는 해결해 주지 않는다.

영화는 한국전쟁의 아픔을 춤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오락 영화도 아니고 충실한 전쟁 영화도 아니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가슴 아픈 민족상잔의 기억을 떠올리는 불편함 속에서도, 춤을 사랑했던 젊은이들의 뜨거운 가슴을 끌어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춤을 추면서 인민군과 국방군의 벽을 허물었던 순간을 잠시라도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록 판타지일지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춤(예술)은 결국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지만 꺼지지 않는 불씨를 심어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단 한 명일지라도 그 불씨를 품을 수 있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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