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창초의 보랏빛이 애잔하다. 제비꽃보다 몸을 낮추어 땅에 붙어 피어나는 탓으로 평지에서는 눈에 띄기도 어렵다. 그래서인지 무더기로 피어서 존재감을 보여준다. 조계산 언덕배기를 오르다 보니 얼레지 무더기가 눈길을 잡는다. 쉽게 만나기 어려운 야생화이다. 도심을 벗어나니 남도의 봄이 심금을 울리면서 애틋하게 피어난다. 작년에 눈길이 머물렀던 공간을 찾으면서 오르는 이른 봄의 산행은 고요함의 미덕을 지닌 겨울산과는 달리 곱게 소란스럽다.
대지와 가깝게 숨 쉬는 수많은 생물의 숨결을 신비롭게 느끼면서도 기어다니는 존재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특히 뱀이나 다리가 많이 달린 작은 생물을 만나면 자연의 신비로움이 두려움으로 반전되는 공포감으로 고통스럽다. 그래서 친환경이라는 말이 다양한 의미로 쓰이지만 우리가 벌레라고 싸잡아 부르는 존재에까지 그 범위를 넓히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해충과 익충이라는 인간 중심의 기준을 만들어서 철저하게 차별과 멸시의 시선을 정당화하는 사고에 익숙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이에게는 생명체를 만나는 공감대가 무한대로 열려있다. 복숭아를 먹다가 툭 튀어나온 벌레에 어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소란을 피우는데 갓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뗀 조카애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서슴없이 손에 올려놓고 천진한 웃음을 보였다.
“귀엽다.”
이 한마디에 모두 까무러치며 폭소를 터뜨렸다. 아기에게조차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꼬물거리는 애벌레는 촉감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약한 존재일 뿐이다. 애벌레 사건 이후로 나는 미물의 생명체에 조금씩 관심을 넓히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땅강아지를 만지면서 놀았고, 여름철이면 송충이가 마루에까지 오르내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모기, 파리는 귀찮고 성가셨지만, 경악의 대상은 아니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쥐가 들락거리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때로는 쥐의 눈이 예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집안에 개미나 모기, 파리가 출현하면 마지막 한 마리조차 전멸시켜야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 낯선 존재를 혐오하는 강퍅한 마음이 당연하게 이기적 본성을 키우고 있음을 자각하며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최근에 거미줄을 찾는 습성이 생겼는데 『샬롯의 거미줄』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이슬을 머금었다가 햇살에 반짝이는 거미줄의 신비로움은 문학작품에서 자주 만나는 문장인데 지금은 참으로 귀한 장면이 되고 말았다. 이슬비가 내린 숲길에서 직접 마주친 기억이 너무 오래전이라 까마득하다. 거미줄은 백사장에 남긴 물결무늬의 아름다움이나 게 발자국이 주는 자연의 선물만큼 특별한 존재 미학이 담겨있다.
『샬롯의 거미줄』에는 동심을 바탕으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과정에 이르는 다양한 무늬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담겨있다. 무녀리 돼지를 죽음에서 구해준 건 여섯 살 ‘펀’이다. 돼지의 젖꼭지가 10개인데 새끼가 11마리이니, 농장주로서 도끼를 가지고 무녀리를 처단하는 건 당연한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펀은 몸집이 작고 약하다는 이유로 죽여야 한다는 논리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나도 작게 태어났으면 죽였겠네요?”
아빠는 항의하는 어린 딸의 요구를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펀은 아빠의 도끼로부터 새끼 돼지를 구하여 윌버라 부르면서 정성껏 키운다. 윌버의 몸집이 커져 더 이상 집안에서 키울 수가 없게 되자 거처를 옮긴다.
그곳에서 윌버는 거미 샬롯과 친구가 된다. 펀은 윌버를 만나러 헛간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염소, 거위, 양, 쥐와 거미가 주고받는 대화에 빠져든다. 그러나 스프링 돼지는 크리스마스에 먹을 햄과 베이컨, 소시지를 만들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걸 알고 고통스러워한다. 윌버는 눈(雪)이 보고 싶다며 죽기 싫다고 몸부림친다. 샬롯은 윌버가 눈을 볼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 모두가 징그럽다고 멀리하는 거미 샬롯과 무녀리 돼지 윌버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샬롯은 인간을 상대로 돼지를 살려내는 어려운 업무를 완수한다. 거꾸로 매달려서 지혜를 짜내고 밤을 새워 거미줄을 짜는 고행의 시간을 감내하는 것이다. 쥐 템플턴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펀은 인간과 동물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샬롯이 어떻게 돼지의 목숨을 구하게 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적을 믿는 마음’이 중요하다. 영화에 빠져들면서 돼지와 사람과 거미가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된다. 꽃이 피고 생명이 탄생하는 자연의 신비, 살아 있음 자체가 기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기적을 믿는 마음’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들과 인간이 깊이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샬롯은 윌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최선을 다하여 작품으로 완성한다. 그 작품은 상황을 반전시킨다.
김만중이 『사씨남정기』로 숙종에게 깨달음을 준 것처럼 윌버를 “멋지고, 대단하고, 겸손한 존재”로 돋보이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샬롯의 작품’이 궁금하지 않은가? 다행스럽게도 누구나 작품을 감상할 방법이 있다. 말로나 글로 옮기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직접 영화 또는 책을 통해야만 한다. 기적을 믿기 위해서는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누군가와 함께 조계산 보리밥집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생명을 구하고, 삶이 지닌 아름다움과 환희를 키우는 일, 샬롯과 펀, 그리고 새끼 거미들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거미줄을 찾아다니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더 좋을 것 같다.
『샬롯의 거미줄』, 게리 위닉 감독, 미국, 2006년. 9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