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파직된 조병갑, 공주로 피신하였다 체포되어 유배 생활 1년 2개월만에 사면받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4. 세 번째 고부군수 조병갑과 동학농민혁명
■1894 고부군수(3) / {파직ㆍ유배}■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 1858~?)이 조병갑을 고부군수로 유임(留任)할 것을 요구한 탓인지 한 달 이상 비어 있던 고부군수 자리에 전 고부군수 조병갑이 유임되어 1894년(고종 31) 1월 9일(양력 12월 14일) 재임명되었다.
【전라감사 김문현이 청한대로 고부군수 조병갑을 특별히 그대로 있게 함】 이조(吏曹) 계목(啓目)에, “… 이번 전라감사 김문현의 장계를 보니, ‘전 고부군수 조병갑이 오랫동안 포흠(逋欠: 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이 씀)한 많은 수를 차례로 메워 장부를 정리해야 하는데, 조세를 받는 일이 한창 벌어지고 있어서 아직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신이 다른 고을로 옮겨 가고 이 일을 새로운 사람에게 맡긴다면 잘못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도신(道臣)의 장계 내용이 이와 같으니, 장계에서 청한대로 특별히 잉임(仍任: 그 자리에 그대로 둠, 유임)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판부(判付)하였다. -『승정원일기』 3042책(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1월 9일 무자(정해) 25/28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고부봉기○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유임되어 재임명되자 1894년 1월 10일(양력 2월 15일) 고부군민은 조병갑이 재임명된 것과 그의 탐학에 항의하며 항쟁을 일으켰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시위대가 말목장터에서 봉기(고부봉기, 고부기포)하였다. 1월 11일 새벽 고부관아(현재 건물은 없어지고 그 터에 고부초등학교가 세워짐)를 습격하였으나 조병갑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조병갑은 농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고부 입석리에 사는 부호(富豪) 정 참봉 집에 숨어 있다가 변장한 상태로 야밤에 정읍, 순창을 거쳐 전주감영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관찰사 김문현에게 사태를 보고하였다.
들고일어난 고부군민은 1월 17일 만석보를 파괴하였다(국사편찬위, 『동학농민혁명사 일지』). 현재 만석보가 파괴된 곳에는 1898년 9월에 건립한 ‘만석보 혁파 선정비’(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97-1)가 세워져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조병갑 파직○ 1894년 2월 15일 그동안 조병갑을 보호하던 전라도 관찰사 김문현은 조병갑의 악행이 폭로되자, 이제야 조병갑을 파직해야 한다고 장계를 올려 조병갑을 체포하겠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의금부는 직무를 방치한 김문현을 월봉삼등(越俸三等: 봉급의 액수를 세 등급 줄임)에 처하고, 이용태(李容泰, 1854~1922, 일제강점기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안핵사(按覈使)로 파견하여 엄히 조사하도록 왕께 청하였다. 그리고 고부군수 후임으로는 박원명(朴源明)이 임명되어 조병갑은 2월 15일 자로 고부군수에서 파직되었다.
【의금부, 고부 난민의 소요와 관련하여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월봉삼등의 형전을 시행하고 소요를 초래한 고부군수 조병갑을 잡아다가 심문할 것을 청함】 또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전라감사 김문현이 올린 장계의 등보(謄報: 원본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서 보고함)를 보니, 고부의 난민(亂民)을 잡지 못했고 명확한 조사도 행해지지 못했는데, 단지 해읍(該邑)의 백성이 폐단을 조목조목 진술한 소장과 해읍의 수령을 파직하여 나문(拿問)하는 것으로 논죄한 것과 해당 관속(官屬)에 대해 공초(供招)를 받아 처벌해 달라는 요청만 있었습니다. 요사이 백성들의 소요는 대부분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믿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렇긴 해도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백성들의 습성이 패악한 것은 고부처럼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 설사 고통을 견딜 수 없어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무리를 불러 모아서 제멋대로 법을 무시하고 본분을 어긴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주모자와 추종자를 구핵(鉤覈: 범죄 사실을 조사하여 캐냄)하여 구별해 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道)를 안찰(按察: 자세히 조사하여 살핌)하는 지위에 있는 자가 한갓 파발로 장계만 누차 올리면서 난적(亂賊)의 괴수가 날뛰도록 내버려 두고 백성의 패악한 습성을 징계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조령(朝令: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국체(國體)를 보존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번의 소요는 실로 원망이 쌓여 조화를 해치게 하는 정사에 기인한 것이니, 필시 그 원인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해당 수령이 직무를 방치하여 일을 그르쳤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사가 처음에는 그를 표창하고 잉임(仍任)시킬 것을 청하다가 끝에 가서는 파직하여 나문(拿問)하기를 청하였으니, 어쩌면 이리도 앞뒤가 상반된단 말입니까. 일마다 개탄스러우니, 경책(警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우선 먼저 월봉삼등(越俸三等)의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고부군수 조병갑이 백성의 소요를 초래한 죄와 범장(犯贓: 장물임을 알고서도 사고파는 일)을 하여 재물을 탐한 죄는 이미 도신(道臣)의 계사(啓事: 임금에게 아뢰는 일 또는 글)에 일일이 나열되어 있으니, 의금부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그리고 고부군수의 대임(代任)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일반적인 격식에 구애받지 말고 구전으로 각별히 가려 차임(差任: 관리를 임명하는 일)한 다음, 당일로 하직 인사를 하게 하고 말을 지급하여 내려보내소서. 지금 들으니, 백성들의 소요가 다시 일어나 여러 가지 소문이 파다하다고 합니다. 난민이란 자들이 어찌 모두 본성을 잃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위협에 겁을 먹고 때를 타서 불평을 풀려는 데에 불과하니, 철저히 사핵(查覈: 실제 사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밝힘)하여 법대로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고부군 안핵사로 차하(差下: 벼슬을 시킴)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구전으로 하비(下批: 인사 임용에 관한 임금의 재가)하게 한 다음, 밤길을 도와 달려가서 엄히 조사하여 등급을 나누고 구별하여 등문(登聞: 대궐에 나아가 임금에게 알림)하게 하소서.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책으로 말하면 죄인들을 일체 소상히 논죄해야 할 것입니다만, 봄 농사가 한창인 지금 온 경내가 더욱 소란해지면 반드시 살 곳을 잃고 농사철을 잃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주모자 외에 속임수에 빠졌거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무리들은 가급적이면 다시 조사하여 형벌을 공평히 매기고 일일이 타일러 각각 본업에 안주하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위무(慰撫)하는 뜻을 보이도록 삼현령(三懸鈴: 급한 공문을 띄울 때 봉투에 세 개의 동그라미를 찍던 일)으로 행회(行會: 정부 명령을 각 관청에서 시행‧상의하는 모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3043책(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2월 15일 임술 20/24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고부군수에 박원명을 제수함】 이조(吏曹)가 구전(口傳) 정사(政事)를 하여,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古阜郡守)로 삼았다. -『승정원일기』 3043책(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2월 15일 임술 17/24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조병갑 피신○ 1894년 2월 17일, 충청도 공주 땅으로 내려가 있다는 조병갑을 잡아 올 것을 의금부가 청하였는데, 왕은 기다렸다 잡아들이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원문을 보면 “趙秉甲下去忠淸道公州地云”이라고 하여 ‘하거(下去: 위에서 아래로 내려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주감영으로 도망갔던 조병갑이 서울에 있다가 지방 공주로 내려갔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조병갑이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갔다가 공주로 내려왔다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찾지 못하였다. 또 왜 서울로 올라갔는지, 다시 공주로 내려왔으면 공주 어디에서 머물렀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도 찾지 못하였다. 하여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피신한 조병갑이 공주 신풍면 평소리 집에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숨어 있었는지는 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조병갑이 전주감영으로 도망갔다가 나중에는 공주로 피신, 이곳에서 숨어지낸 것만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의금부, 공주로 내려간 조병갑을 잡아 올 것을 청함】 윤상철(尹相澈)이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전 고부군수 조병갑을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도록 전지(傳旨)로 계하(啓下)하셨습니다. 조병갑이 충청도 공주로 내려갔다고 하니, 규례대로 본부의 나장(羅將)을 보내어 잡아 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대명(待命)하기를 기다려 나수(拿囚: 죄인을 잡아들이어 가두는 일)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43책(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2월 17일 갑자 10/15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이와 관련하여 『공주와 동학농민혁명』(박맹수·정선원, 2015, pp.277-282.)에서는 조병갑 가족이 3년간 피난했던 공주 사곡면 동해리(현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 사락골(선학동) 집터와 조고비굴(고비는 군수를 가리키는 말. 고부군수를 지낸 조병갑을 ‘조고비’라고 불렀다 하며, 조고비굴은 조고비가 숨어지내던 굴)을 소개하고 있다.
또 동해리 마을 사람이 전해주는, “전라도에서 원을 했던 조병갑이 싸리둥우리를 타고 왔다. 조고비 어머니가 사락골에서 환갑잔치를 했다. 3년 정도 동해리에 있었다. 동학군을 피해 낮에는 사락골 뒷산의 조고비굴에 있다가 밤에는 사락골 집에 거처했다. 숱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 쌀 닦은 쌀뜨물이 구계리 냇가 구시울까지 내려갔다. 조고비는 하루 열두 끼 정도 먹었고, 한 끼에 닭 한 마리를 삶아서 먹었다. 가마꾼이 투덜댈 정도로 몸집이 엄청 뚱뚱했던 모양이다. 동네에 조고비를 전라도 고부에서 업고 여기까지 왔던 이의 사위가 동네에 살았다. 동해동 근처 사람들은 조고비네 집에 나무해서 대어 주고 품팔아 먹었다. 조고비를 찾아 전라도 양반들이 동해리에 자주 왔다. 많은 곡물을 실어 왔다. 양반들이 오면 그 종들이 특별히 말여울을 만들어주지 않고 곡식밭에 말을 풀어 놓아 폐를 끼쳤다고 한다. 땔감이 부족하자 조고비의 종들이 고개 넘어 용수리에 가서 과실나무조차 땔감으로 베어 가지고 왔다고 한다”라는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조병갑과 같이 마을에 들어왔던 사람 중에 이호장이 있었는데 조병갑 첩의 아버지였다”라는 구술(口述)과 함께 “이호장이 죽어 동해리에 화려하게 묘를 썼다. 어려운 시정인데 비단으로 송장을 하고, 장정 하루 품값이 한 되인데 한 장을 산소로 져 가면(지고 가면) 한 말을 주었다. 그런데 동학군 패잔병들이 시신의 목을 가져다가 재물과 바꾸려고 했다. 동네 사람 중에 새벽녘에 옷에 이슬이 젖어 있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에게 내통한 혐의를 두었다. 큰삼박골 입구 백사장에서 작수매(상투를 나무에 묶어놓고 두들겨 패는 일)해서 일본 헌병이 두들겨 패서 죽였다. 맞아 죽기 전에 얼마나 맞았는지 말은 못 하고 입으로 백사장 뒤편의 큰바위 쪽을 가리켜서 백사장 돌 틈에서 목을 찾았다. 이 일로 광목 한 통을 상으로 받은 동네 사람이 있었다. 동학군들은 다 잡지 못하고 다 도망갔다. 큰삼밭골에 우리집이 있어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이다”라는 구술도 소개하고 있다.
이상의 자료로 보면 조병갑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공주 유구읍 동해리로 피신하여 이곳에서 숨어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동해리에서 조병갑이 숨어 살던 집과 낮에 따로 숨어지내던 동굴(조고비굴)까지 있었다는 이야기, 조병갑 어머니의 환갑잔치가 동해리에서 치러지고 이호장이라는 이도 함께 동해리에 들어왔다는 이야기 등을 비롯하여 동학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채록(採錄)하며 정리한 것은 대단한 발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마을 사람들이 전한 이야기에는 몇 가지 의문스러운 게 있다. 우선 ‘이호장’이라는 이의 이름 ‘호장’이 ‘고려·조선 시대 향리 벼슬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일반명사 ‘호장(戶長)’을 말하는지, 아니면 고유명사 ‘호장’이라는 이름인지가 불분명하다. 또 이호장을 ‘조병갑 첩의 아버지’라고 하였는데 양주조씨 족보에 기록된 조병갑의 측실(첩)은 청송심씨(靑松沈氏)이며, 그녀의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훈(沈相薰)이다. 이씨가 아니라 심씨다. 그리고 조병갑의 본처는 전주이씨 이병양(李秉兩)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이병문(李秉文)의 딸이다. 혹 이호장을 이병문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병문은 1888년 사망하였으니,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동해리로 들어온 이호장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조병갑에게 청송심씨 이외에 족보에 나오지 않는 또 다른 첩이 있었다는 것인지? 좀 더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조병갑이 동해리에 피신해 있을 때 어머니 환갑 잔치를 이곳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양주조씨 족보에 기록된 조병갑 어머니로는, 아버지 조규순의 본부인 덕수이씨(德水李氏)와 측실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있다. 어머니 덕수이씨는 조병갑이 태어난 지 2년 만인 1846년에 사망하였으니, 동해리에서 환갑 잔치를 한 어머니는 친어머니인 김해김씨일 것이다. 그런데 조병갑은 1889년 4월 고부군수로 발령받았으나 3개월 후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군수직을 사퇴하였는데, 이때 상을 치른 어머니는 김해김씨로 파악된다. 그런데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공주 동해리에 피신해 있으면서 어머니 환갑 잔치를 치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동해리에서 환갑 잔치를 치른 어머니는 김해김씨도 아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인가? 자료가 없어 확인되지 않는다. 혹 족보에 나오지 않는 또 다른 첩의 어머니가 아닐까 싶다.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한편, 「사랑골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상) 조고비, 조고부 혹은 조판사 무덤에 대하여」(유기종, 2017)라는 글에 따르면, 『대흥면지(大興面誌)』(1914)에 조병갑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대략 “동학농민혁명 이후 조병갑은 대흥군에 숨어들었다. 대흥은 양주조씨가 세도가를 이루고 있어 연고가 있었으며 그를 추적하던 동학군을 피해서 이곳에 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자 유구 동해동으로 피신하였다. 이곳에는 지금도 20여 개에 달하는 조병갑 식솔들의 무덤이 있다. 이후 그는 다시 공주군 신하면(현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로 세간의 눈을 피해 도망가 여생을 마친 후 이곳에 묻혀 있다”라는 내용이라고 한다. 조병갑이 ‘예산 대흥에 숨어 있다가 공주 동해리로 피신, 다시 평소리로 도망’했다며 조병갑의 피신 과정을 그나마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처럼 조병갑의 피신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가 더 있으면 좋을 것이다.
○고부군민 해산○ 고부군수 후임으로 부임한 박원명은 전라도 출신으로 광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부유한 집안 태생으로, 자못 재주도 있고 임기응변이 있어 민영준(=민영휘)이 그를 뽑은 것이었다. 부임해 온 박원명은 전봉준이 주둔하고 있는 진영에 서찰을 보내 “내 뜻은 백성을 편안케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 그대들과 이곳 사정을 의논코자 하니 민군(民軍) 중에서 이부(吏部) 이하 자리를 선발해 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3월 3일에는 이들을 초청하여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잔치를 풍성하게 벌여주면서 “조정에서도 죄를 용서해 주었으니 각자 돌아가서 생업에 편안히 힘쓰라”라고 당부하였다. 그러자 농민군들은 현저히 동요하는 빛을 보이면서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1894년 3월 13일 고부군민이 해산하여 고부봉기는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고부로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는 박원명과 달랐다. 2월 16일 안핵사로 임명된 이용태는 병을 핑계로 움직이려 들지 않다가 봉기가 수그러진 무렵인 3월 초에 병졸을 이끌고 고부에 들어와 봉기 참가자와 주동자를 색출하는가 하면 동학교도와 농민을 붙잡아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처자를 살육하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러나갔다.
○무장봉기(제1차 동학농민혁명)○ 이용태의 동학교도 탄압을 비롯한 지배층의 학정에 맞서 전봉준을 비롯하여 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華中)·최경선(崔敬善) 등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힘을 모아 전북 고창 무장(茂長)에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였다. 3월 20일(양력 4월 25일)경 드디어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내세운 창의문 발표와 함께 동학농민군이 봉기(무장봉기, 무장기포)하였다. 동학농민혁명(제1차 기포, 제1차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이 타올랐다. 부정부패로 찌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시위가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시작하여 농민과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혁명의 불길이 되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전라감사 김문현이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서고, 조정에서는 4월 2일 홍계훈(洪啟薰)을 전라도와 충청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지만, 번져나가는 혁명의 불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황토현전투○ 1894년 4월 7일(양력 5월 12일) 벌어진 황토현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관군을 무찌르고 승리하였다. 황토현에서 패한 관군 사령관 홍계훈은 조정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고종은 최측근이자 농민군의 타도 대상이기도 한 민영준(=민영휘)과 함께 국내 주둔 중이던 청군 사령관 원세개(袁世凱,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 위안스카이)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 북양통상대신(北洋通商大臣) 이홍장(李鴻章, 리훙장)은 조선 정부의 공식 요청에 따라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에 일본도 청나라와 1885년 맺은 톈진조약[천진조약(天津條約)]의 ‘조선 파병은 공동으로 한다’라는 조항을 근거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조병갑 체포○ 고부봉기가 일어난 지 석 달이 훨씬 지난, 제1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근 한 달 만인 1894년 4월 18일, 고종은 호남 백성에게 생업에 종사하도록 알아듣게 타이르고,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책임을 물어 파직하고, 조병갑을 잡아 오라고 이제야 명령하였다.
【조병갑을 잡아 오라고 명함】 이중하(李重夏)에게 전교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낸 것은 살리기 위해서이니, … 왕정(王政)에 형벌이 있는 것도 부득이하여 그런 것이니, 흉악하고 해로운 자를 제거해야만 백성들이 마침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된다. 가령 한 사람이 고약한 짓을 하여 한 마을이 고통을 당한다면 그를 징계해야 하는 법이니, 혹여 한 사람을 차마 처벌하지 못한다면 장차 수십 수백 명을 방치하는 꼴이 될 것이다. …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우선 간삭(刊削: 관직이나 공신의 지위를 빼앗음)하는 형전을 시행하라. 호남의 민란은 고부(古阜)에서 처음 시작되어 점차 이렇게 확대된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마땅히 한차례 구핵(鉤覈)해야 할 것이니, 전(前) 군수 조병갑은 의금부로 하여금 도사(都事)를 보내어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워 잡아 오게 하라. 조사하는 것은 법의(法意)가 더없이 급하건만 아직까지 사계(査啓: 어떤 사건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를 왕에게 올린 보고)는 없고 도리어 소란만 가중되고 있으니,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 또는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이나 상황)가 손상된 데다 잘못하여 그르친 일도 많다. 고부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에게 찬배(竄配: 장소를 정하고 죄인을 귀양보냄)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이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민란이 발생한 읍의 수령에 대해 낱낱이 조사하여 논계(論啓: 잘못을 따짐)하게 하고, 조정에서도 그 경중에 따라 속히 해당 형률로 다스림으로써 민심을 위로해야 할 것이다. 이런 뜻까지 아울러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묘당(廟堂: 의정부)으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관문으로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45책(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4월 18일 갑자 16/44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1894년 4월 20일 의금부는 조병갑을 잡아 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고 보고하였다. 결국, 고부봉기가 일어나자, 전주로 도망갔다가 다시 공주로 피신해 있던 조병갑은 붙잡혀 수갑과 차꼬를 차고 칼을 쓴 채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차꼬는 구멍을 판 두 개의 기다란 나무토막을 맞대어 죄인의 두 발목을 구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 움직이지 못하게 하던 형벌 기구이며, 칼은 두껍고 긴 널빤지에 구멍을 뚫어 죄인의 목을 끼워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형벌 기구이다. 조병갑은 중죄인으로 취급되어 차꼬와 칼을 쓴 상태로 공주에서 서울로 압송된 것이었다.
【조병갑 체포】 이중하(李重夏)가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전(前) 고부군수 조병갑을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워 잡아 오도록 전지(傳旨)로 계하(啓下)하셨습니다. 본부(本府) 도사(都事)를 보내어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워 잡아 와 남간(南間: 의금부 남쪽에 있는, 사형수를 가두던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3045책(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4월 20일 병인 16/18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그러나 1894년 4월 22일 올라온 장계(狀啓)를 보면 조병갑을 조사하여야 할 관리들이 사정이 있어 자리가 없는 관계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다른 사람으로 임명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 4월 23일 의금부가 올린 장계에는 “조병갑이 입을 제대로 열지 않는다”라고 보고하면서 고문을 가하면서 조사할 수 있도록 왕께 청하기도 하였다. 조병갑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의금부, 전 고부군수 조병갑을 형추하여 실정을 캐낼 것을 청하는 계를 올림】 의금부 계목(啓目)에, “전(前) 고부군수 조병갑이 원정(原情)에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전지(傳旨) 내의 내용으로 문목(問目)을 만들어 구핵(鉤覈: 범죄 사실을 조사하여 캐어 냄)하였더니, 처음에 일어난 민란은 징쇄(徵刷: 세금을 거두는 일)하는 문제로 인해 발생하였고, 재차 다시 발생한 소란은 체임(遞任: 벼슬에서 물러남)되어 온 뒤의 일이라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모호하게 공초(供招)하고 끝내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으니, 그 정상을 따져 보건대 지극히 놀랍습니다. 평문(平問: 고문하는 도구를 써서 닦달하지 않고 그냥 죄인을 심문함)으로는 자복을 받아 낼 수 없으니, 형추(刑推: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며 캐어묻는 일)하여 실정을 캐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판부(判付)하였다. -『승정원일기』 3045책(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4월 23일 기사 15/16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전주성 점령○ 1894년 4월 27일(양력 6월 1일) 기세가 오른 동학농민군은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향하였다. 당시 홍계훈이 이끄는 부대는 다른 곳에 있었으며,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지키는 관군을 무찌르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도망가고 없었다.
○청군과 일본군 상륙○ 전국적으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한 가운데 5월 4일(양력 6월 7일) 조선 정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요청한 청나라 군대가 충남 아산만 상륙(05.02. 섭지초, 05.05. 섭사성 상륙)하였다. 이어 1885년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5월 6일(양력 6월 9일) 인천항 상륙하였다.
○조병갑 유배○ 1894년 5월 4일 의금부는 자꾸 거짓말로 꾸며대는 죄인 조병갑에 대해 정강이를 때리며 다시 엄하게 조사할 것과 멀고 험한 곳으로 유배 보낼 것을 왕께 요청하였다.
【죄인 조병갑의 죄에 대해 실정을 캐낼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목】 의금부 계목(義禁府啓目)에, “원 문건은 첨부하였습니다. 죄인 조병갑(趙秉甲)이 원정(原情)에 운운하였습니다. 다시 문목(問目)을 만들어 엄히 형신(刑訊: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며 캐어묻는 일)하였으나, 한결같이 말을 꾸며대면서 끝내 사실대로 바르게 말하지 않고 불분명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너무도 놀랍습니다. 고신(拷訊: 고문하여 조사함) 기한이 차기를 기다려 다시 더 엄히 형신(刑訊)해서 기필코 실정을 캐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판부(判付)하기를, “이 죄수는 비단 장죄(贓罪: 관리가 뇌물을 받은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들을 학대한 일도 많아서 남도(南道)의 소란이 점점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심상(尋常)하게 처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한차례 엄히 형신한 뒤에 원악도(遠惡島: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살기 어려운 섬)에 안치(安置)하는 형전(刑典)을 속히 시행하여 당일로 압송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46책(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5월 4일 경진 12/16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1894년 5월 5일 조병갑에게 원악도(遠惡島), 즉 멀리 있는 험한 섬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유배지 전남 강진현 고금도(현 완도군 고금면 고금도)는 먼 곳이긴 하나 험한 곳이 아니었다. 고금도는 강진 마량포구 육지에서 가까이 있으며 물자가 풍부한 넓은 섬이었다. 더구나 조병갑은 유배형을 받긴 받았지만, 그의 죄목이 채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어찌 보면 유배라기보다 도피에 가까울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한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에 대한 처벌로는 너무 가볍고 허술해 보인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조정 대신들이 조병갑을 감싸주어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닐까 싶다. 조병갑을 유배지로 보내면서 재계(齋戒: 제사를 올리기 전에 심신을 깨끗이 하고 금기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일)를 마친 뒤에 보낸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겉으로는 정강이를 때리며 조사한다고 하였지만, 막상 죄인 조병갑을 엄하게 조사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의금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 조병갑에 대해 재계가 끝난 뒤 유배지로 보낼 것을 청함】 또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남간(南間)에 갇혀 있는 죄인 조병갑의 구초공사(口招公事)에 대한 판부(判付) 안에, 다시 한차례 엄히 형신(刑訊)한 뒤에 원악도(遠惡島)에 안치(安置)하는 형전(刑典)을 속히 시행하여 당일로 압송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조병갑을 칼과 수갑을 풀어 서간(西間: 의금부 서쪽에 있는 감옥)으로 옮겨 가두었는데, 연이어 재계(齋戒) 일을 만났으니, 재계가 끝난 뒤에 엄히 형신하고 배소(配所: 유배지)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3046책(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5월 5일 신사 18/18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조병갑이 비록 유배를 갔지만, 그의 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서인지 5월 20일 이설(李偰)이 상소를 올려 현재의 폐단에 대해 논하고 조필영과 조병갑 등의 죄상을 규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5월 21일 의정부에서는 “조필영과 조병갑에 대해서 왕께서 아주 밝게 통찰하시어 처분을 이미 내리셨으므로 지금 다시 더 여쭈어 재결을 받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조필영은 호남전운사(湖南轉運使)가 되어 당시 직권을 이용, 세금으로 걷은 쌀을 불법으로 수탈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한 원인을 제공한 자이다. 그 죄로 1894년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이듬해 석방된 자이다.
【이설이 상소를 올려 현재의 폐단에 대해 논하고 조필영과 조병갑 등의 죄상을 규탄함】 사과(司果) 이설(李偰)이 상소를 올려 현재의 폐단을 논하고 전운사 조필영(趙弼永), 균전사 김창석(金昌錫), 전(前) 고부군수 조병갑, 안핵사 이용태(李容泰),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 영광군수 민영수(閔泳壽) 등의 죄상을 규탄하니, 비답(批答: 상소에 대한 임금의 대답)하기를, “이 논의가 사실이라면 모두 듣기에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간혹 확실하게 지적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모두 묘당(廟堂)에서 해당 도신(道臣)에게 알아보고 즉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5월 20일 丙申 3번째 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개국(開國)은 조선이 세워진 1392년을 원년으로 삼아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사용한 연호로,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용하기 시작해 1895년까지 사용하였다.
【의정부에서 조병갑 등을 처벌할 것을 청함】 당시 조병갑은 고금도에, 조필영은 함열현에, 이용태는 금산군에, 김문현은 거제도에 유배 중이었다.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사과(司果) 이설(李偰)의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 상소에 대해 임금이 내리는 답변)를 삼가 보니, 그 안에 ‘만일 이 논(論)과 같다면 모두 놀라운 일인데, 또한 정확하게 지적하지 않은 것도 있다.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해당 도신(道臣)에게 조사해서 캐물은 다음 즉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의 소본(疏本)을 가져다 보니, 조필영, 김창석, 조병갑, 이용태, 김문현, 민영수 및 열읍(列邑)의 수령들을 논핵(論劾: 윗사람의 명령을 받아 일을 처리함)하였습니다. 그런데 김문현, 조병갑, 이용태, 조필영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아주 밝게 통찰하시어 처분을 이미 내리셨으므로 지금 다시 더 여쭈어 재결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 -승정원일기 3046책(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5월 21일 정유 12/17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5월 21일 정유 1번째 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전주화약○ 1894년 6월~8월에 전라·경상·충청도 각 지역에서 농민봉기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군과 청군이 들어와 서로 다투는 사이에 정부는 하루속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회유하고 폐정개혁안을 약속하였다. 이에 5월 8일(양력 6월 11일) 전봉준과 관찰사 김학진이 전주에서 회담하여 관민상화책(官民相和策, 폐정개혁 12개 조항)에 합의하고, 동학농민군은 해산하였다.
김학진(金鶴鎭, 1838~1917)은 김문현 후임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온 자로, 일제강점기 일제로부터 조선 귀족 작위를 받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자이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 경복궁 점령을 점령하고,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새벽 청군과 아산에서 맞부딪혀 전투가 벌어졌다. 이렇게 일본과 중국 간에 벌어진 청일전쟁이 우리나라 땅에서 일어났다(6월 21 경복궁 점령 때부터를 청일전쟁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조병갑 처벌○ 지난 5월에 조병갑에 대해서 “왕께서 아주 밝게 통찰하시어 처분을 이미 내리셨으므로 다시 더 여쭈어 재결을 받을 것이 없다” 하던 의정부는 7월 17일 조병갑이 고부에서 수탈한 세미(稅米)를 충청도에 있는 집에서 받아 낼 것을 왕께 요청하고 고부민에 대한 조세 감면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조병갑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제라도 죄를 따져 묻겠다는 것이다. 하여 8월 19일 의정부는 전 고부군수 조병갑의 범세미(犯稅米) 납부를 독촉하여 조병갑의 하인을 체포해서 조병갑이 범한 세미를 징수하도록 하였다. 또 9월 16일에는 충청도관찰부(觀察府)가 탁지아문(度支衙門, 오늘날 재무부)에 ‘미납한 쌀·콩의 납부, 조병갑 하인이 횡령한 세미, 각 고을 둔전(屯田)의 세금 징수와 상납 등’에 대해 “전 고부군수 조병갑 집안 사내종을 엄히 가두고 저지른 세미를 부리나케 징수할 일입니다”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조병갑이 수탈한 세미를 받아 낼 것을 청함】 또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 ‘고부읍(古阜邑)이 두 번이나 민란을 겪었으니, 바로잡아 구제할 대책을 다른 고을보다 우선적으로 강구해야 합니다. … 이 고을이 큰 재난을 겪은 뒤로 온 경내가 탕진되고 쇠잔하여 고을의 형편과 백성의 실정이 과연 장계의 내용과 같으니, 아무 관계 없는 사람에게 백징(白徵: 세금을 될 까닭이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세금을 매김)하거나 거듭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결 200결 17부 2속과 원래의 진결 307결 5부 4속에 대해서는 모두 3년을 기한으로 징세를 정지하여 조정에서 돌보아 주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고, 유망(流亡: 떠돌아다니는 일‧사람)으로 인한 미수세곡을 허감(虛勘: 가짜로 세금을 매김)한 1580석은 차라리 원칙에 위배되더라도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이 낫다는 뜻에 입각하여 특별히 상정가(詳定價: 정해진 가격)로 대신 바치게 하되, 신임 전운사(轉運使)와 이전 전운사로 하여금 장부를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전 군수 조병갑이 실어간 세미에 대해서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로서 매우 놀랍고 개탄스럽습니다. 전 군수가 비록 이미 섬에 안치되었다고는 하나 그 집이 충청도에 있는바, 체임되기 전에 배삭조(排朔條: 몇 달로 나누어 줄 분량)를 제외한 659석 10두 7승 2홉 6작은 해도(該道)의 감사에게 관문을 띄워 가동을 붙잡아 가둔 다음 즉시 독촉하여 받아서 정세(正稅) 문제를 마무리 짓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3048책(탈초본 139책) 고종 31년 7월 17일 신묘 12/25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삼례봉기(제2차 동학농민혁명)○ 전주화약으로 동학농민군은 해산하고 각 지역에 설치한 집강소를 통해 폐정개혁을 해나갔다. 그러나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에 대한 반감과 동학교도를 탄압하는 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커가는 가운데 9월 10일(양력 10월 12일) 전북 완주 삼례(三禮)에서 동학농민군이 다시 봉기(삼례봉기, 삼례기포)하였다. 사회 개혁과 척왜(斥倭, 항일)를 내세운 동학농민혁명(제2차 기포, 제2차 동학 농민 혁명)이 다시 불타올랐다.
○청산기포○ 충북 옥천군 청산면(靑山面)에 머물던 동학 교주 최시형은 1894년 9월 18일(양력 10월 16일) 전국 동학교도에게 총동원령(기포령, 청산기포)을 내렸다. 이에 9월과 11월에 경기·강원·충청·경상·황해도 등에서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10월 12일(양력 11월 9일) 전봉준이 지휘 아래의 남접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도착하고, 10월 12일~16일 손병희 지휘 아래의 북접 동학농민군도 논산에 도착하여 합류하였다.
○공주전투/우금티전투○ 각지의 동학교도와 농민군이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로 향하는 가운데 천안과 청주 등지의 북접 동학농민군이 천안 목천 세성산전투(10.21.)에서 패배하고, 옥천에서 공주로 들어오던 북접 동학농민군이 대교전투(10.24.)에서 패배하였다. 그리고 논산에 집결한 남북접 연합 동학농민군은 공주로 진군하면서 이인전투(10.23.)와 효포·능티전투(10.24.~25.) 등을 치르며 일본군·관군에 맞섰다. 이어 11월 8일~11일(양력 12월 4일~7일) 우금티를 중심으로 총공격하였다(우금티전투).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논산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는 과정에 크고 작은 전투를 이어졌으며, 이렇게 10월 22일부터 11월 14일까지 22일간 공주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공주전투).
논산으로 후퇴한 동학농민군은 다시 각 지역으로 후퇴하며 전투가 이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항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군과 관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면서 타오르던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은 점점 수그러들었다. 김개남이 전북 태인에서 체포(12.01.)되어 이틀 뒤인 12월 3일 전주에서 처형되었다. 전봉준은 전북 순창에서 체포(12.02.)되고, 최경선도 전남 화순에서 체포(12.03.)되었으며, 손화중은 전북 고창에서 체포(12.11.)되고, 김덕명은 전북 부안에서 체포(1895.01.01.)됐다. 그리고 1895년 3월 29일(양력 4월 23일) 사형 판결을 받은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등은 하루도 지나지 않은 1895년 3월 30일 새벽 2시 서울 무악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당하였다. 최시형은 1898년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마찬가지 교수형으로 사형당하게 된다.
○갑오개혁○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불법 점령한 일본군은 우리나라 내정에 관여하며 개혁을 추진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친일 내각인 제1차 김홍집 내각을 꾸려 왕실을 약화하고 내각을 강화하고, 교정청을 폐지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는가 하면 과거제 폐지, 노비와 천민 해방(신분제 폐지), 조혼 금지, 과부의 개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 각종 개혁을 추진(갑오개혁_제1차 개혁, 1894.06.25.~1894.11.20.)하였다.
또한 일본군은 동학농민군 진압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자 다시 개혁을 추진(갑오개혁_제2차 개혁, 1894.11.21.~1895.05.15.)하면서 본격적으로 내정에 간섭하고 흥선대원군을 배제한 제2차 김홍집 내각(박영효·김홍집 연합내각)을 꾸렸다. 더불어 ‘홍범 14조’를 발표하는가 하면 내각제 시행, 재판소 설치(사법권 독립), 경찰 일원화, 한성사범학교 설치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갑오개혁 내용에는 그동안 동학농민군이 주장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으며, 봉건사회 모순을 해결하고 근대화를 위한 것으로 보이긴 하나, 일제에 의해 추진된 탓으로 군대 개혁에는 소홀하고 무엇보다도 일본이 조선을 자신들의 의도에 맞는 구조로 개편하는 데 초점이 둔 개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한편, 당시 개혁을 추진하였던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일본에 망명하기도 하고, 김홍집과 갑오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그리고 당시 ‘왜대신(倭大臣)’으로 불리던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러 정권이 들어서자, 경찰에 붙잡혀 광화문 앞에서 그동안 일본에 불만을 품었던 군중에게 몰매 맞아 죽었다.
■1895 조병갑 재조사, 석방■ 이렇게 동학농민혁명이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며 많은 동학농민군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전봉준 등이 사형당하기 18일 전인 1895년(고종 32) 3월 12일 갑오개혁 정부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과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 1859~1897)은 고종에게 조병갑을 추가 처벌하기 위해 고금도에 관리를 보내 서울로 압송하여 심문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를 왕이 허락하여 조병갑은 서울로 압송되어 재조사받게 되었다.
【총리대신, 조병갑의 압송과 조사 심문을 건의함】 총리대신과 법무대신이 아뢰기를 “조병갑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벼워 다시 한번 조사를 해서 처벌할 필요가 있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때 이들이 고종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년 호남지방에서 발생한 비적(匪賊)의 소요는 고부에서 처음 발생했는데, 실로 당시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불법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비적의 수괴가 차례로 잡혀 한창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고금도에 안치된 죄인 조병갑을 관원을 보내 압상(押上: 압송하여 끌고 옴)하도록 하여 사핵(査覈: 실정을 자세히 조사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는 칙지를 받들었다. -『승정원일기』 3056책(탈초본 139책) 고종 32년 3월 12일 계미 8/13 기사 1895년 開國 504년 光緖(淸/德宗) 21년
○삼국간섭○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3월 23일(양력 4월 17일) 청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하여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랴오둥반도[요동반도(遼東半島)]와 타이완[대만(臺灣)] 등을 넘겨받았다.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차지하면 만주와 조선을 노리고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에는 불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였다. 3월 29일(양력 4월 23일)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 공사(公使)는 일본 외무성을 방문하여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갖는 것에 반대하였다(삼국간섭). 세 나라를 한꺼번에 상대하긴 벅찬 일본은 결국 청나라에 되돌려 주었으며, 조선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강해졌다.
그동안 일본이 내정 간섭한 것이 못마땅했는지,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콧대가 꺾이고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진 상황이라 그런지, 자신을 무시하는 개혁 내각이 못마땅하였는지 고종은, 1895년 윤5월 3일(양력 6월 25일) 그동안 개혁 정부가 제시한 개혁안을 모조리 거부하고 “작년 6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라고 선언하였다(「왕궁 호위병 교대에 관한 국왕과 내각 충돌보고」, 『일본외교문서』 28권 1책, pp.444~445. 1895년 6월 26일).
한편, 제2차 김홍집 내각(박영효·김홍집 연합내각)은 1895년 5월 재정 궁핍으로 개혁이 중단된 상태에서 일본통인 박영효·서광범과의 갈등, 수구파와 급진파 간의 갈등 심화, 유길준 등의 소극적 협력 등으로 지원 세력이 없었다. 이에 김홍집은 1895년 5월 5일 총재직을 사임(제2차 김홍집 내각 붕괴)하고, 5월 8일 박정양(총리대신)·박영효(내부대신)의 연립 내각이 수립되었다. 박정양은 내각총리대신서리로 임명되어 과도 내각을 이끌어갔으나, 박영효의 주도로 일어난 역모 사건이 들통나 박영호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에 김홍집이 다시 입각하여 7월에 친러내각인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새로 들어섰으며, 박정양(朴定陽, 1842~1905)은 내각총리대신서리에서 물러났다.
○조병갑 석방○ 개혁 내각 제시한 개혁안을 모조리 거부한 고종은, 1895년 6월 27일 “1895년(을미년, 개국 504년) 4월 1일 이전의 범죄 중에서 모반(謀反: 반역, 내란)과 살인, 절도와 강도, 통간(通姦: 간통)과 재물에 대한 협잡(挾雜: 그릇된 짓으로 남을 속임) 죄를 범한 자 외에는 석방하라”라는 조칙(詔勅)을 발표하였다. 즉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렸다.
【개국 504년 4월 1일 이전의 범죄 중에서 모반과 살인, 절도와 강도, 통간과 재물에 대한 협잡죄를 범한 자 외에는 석방한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이 개혁하는 때를 당하여 유신(維新)하는 정사(政事)에 참량(斟量: 사정이나 형편 따위를 어림잡아 헤아림)하는 것이 없지 않으니, 개국 504년 4월 1일 이전의 범죄 중에서 모반(謀反)과 살인, 절도와 강도, 통간(通奸)과 재물에 대한 협잡 죄를 범한 자 외에는 일체 석방함으로써 크게 베푸는 은전(恩典)을 보이라.” 하였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6월 27일 병신 1번째 기사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고종이 내린 1895년 6월 27일 조칙, 즉 대사면령에 따라 조병갑은 1894년 5월 5일 고금도로 유배된 지 1년 2개월 만인 1895년(고종 32) 7월 3일(양력 1895년 8월 22일) 석방되었다. 6월 27일 조칙으로 고종은 총 279명을 사면하였는데, 이때 사면된 인물에는 부정부패에 연루된 민영준(=민영휘), 민영주, 민형식, 민병석, 민응식 같은 척족(戚族: 성이 다른 친척, 외척) 명성황후 여흥민씨 집안사람들이 있었다(민영준, 민형식. 민병석은 일제강점기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 또 양주조씨 집안사람으로 충청도 관찰사로서 공주취회를 탄압하는 등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조병식과 고부군수로 있으면서 만석보를 통해 수탈에 나서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조병갑도 있었다. 여기에 호남전운사로서 직권을 이용하여 수세미에 대한 불법 수탈을 자행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조필영을 비롯하여 전라도 지역에서 탐학을 저질러 민심을 악화시킨 안핵사 이용태, 전라감사 김문현 등이 포함되고, 이외 다른 지방 탐관오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법부에서 6월 27일 조칙에 의하여 민영준 등 279명을 석방함】 법부에서 6월 27일 조칙에 의하여 도형(徒刑: 곤장형)과 유형(流刑: 유배형)의 죄인들인 민영준(閔泳駿), 조병식(趙秉式), 민영주(閔泳柱), 민형식(閔炯植), 김세기(金世基), 민병석(閔丙奭), 이용태(李容泰), 김문현(金文鉉), 이용직(李容直), 조필영(趙弼永), 조병갑(曺秉甲), 민응식(閔應植), 김창렬(金昌烈), 조만승(曺萬承), 임치재(任穉宰), 서정철(徐廷喆), 심능필(沈能弼), 조준구(趙駿九), 민영순(閔泳純) 외 260명을 방송(放送: 석방)하자는 뜻으로 아뢰니, 제칙(制勅: 임금의 명령)을 내리기를, “좋다.” 하였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7월 3일 신축 2번째 기사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을미개혁○ 민씨(閔氏, 여흥민씨) 세력과 함께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지는 것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1895년 8월 20(양력 10월 8일)일 러시아와 손을 잡은 명성황후 민씨를 시해[을미사변(乙未事變), 명성황후시해사건]하고 친일 내각인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했다. 이어 개혁을 추진(을미개혁_제3차 개혁, 1895.08.24.~1896.02.)하여 태양력 실시, 종두법 도입, 소학교 설치, 우편 사무 시작, 중앙에 친위대(親衛隊)와 지방에 진위대(鎭衛隊) 설치, 그리고 단발령(斷髮令)을 단행하는 조치를 하였다. 을미개혁 또한 조선을 위한 개혁이 아니라 근대라는 이름 아래 일제 의도에 맞는 사회로 개편하는 데 그 초점이 있었다.
○양력 사용○ 을미개혁으로 우리나라는 1895년 9월 9일 태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채택, 음력 개국 504년 11월 17일을 양력 개국 505년 1월 1일로 결정하였다. 즉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각종 연표나 역사에 등장하는 날짜는 일반적으로 1895년 11월 16일 이전 날짜는 예전대로 음력 날짜이며, 1895년 11월 17일부터는 1896년 1월 1일로 시작하는 양력 날짜를 사용한다. 본 글에서도 1895년 11월 16일 이전 날짜는 음력을 기준으로, 1895년 11월 17일부터는 1896년 1월 1일로 시작하는 양력 날짜를 기준으로 하였다.
<다음에 '5. 판사가 된 조병갑의 최시형 사형 선고와 청양 거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