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첫 장면은 나탈리가 혼자 버스에 올라서 책을 펼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건 가능한가.”
이 철학적 잠언이 영화의 중심으로 흐른다.
나탈리는 순례자처럼 보인다. 남편과 여행할 때나, 학생들과 토론하거나 강의할 때, 그리고 남편이 이별을 선언할 때조차도 격앙된 감정의 표현이 없다.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것들’과 현재의 ‘나’를 통과하는 길 찾기에서 영화는 지적이고 시적인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구현한다. 다양한 공간이동을 통하여 아름다운 길과 예술가의 흔적과 자연풍광에 혼연일체가 된 주인공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휴양지에서 머무르기도 하면서 적절한 변화를 즐기며 평탄하게 살아왔다. 엄마의 집과 학교,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그만그만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만의 생을 가꾸어온 것이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남편이 떠남으로써 지금까지의 안정된 삶이 흔들린다. 나탈리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길을 떠나는 나탈리에게 예전과 다른 외로움과 불안이 힘겹게 온몸을 흔들어대는 순간 그녀에게 몰입되는 자아를 만나는 순간이 좋다.
프랑스 영화는 때로 막막할 때가 있다. 소용돌이치는 사건 전개가 밋밋하리만치 잔잔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섬세한 감정 연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일이 낯설어질 때는 반복해서 보면 된다. 사색의 시간 속에 푹 잠기면서 말이다. 그래서 관객의 시점이 중요하다.
영화의 밀도 높은 성찰의 언어와 내 안의 속 깊은 갈망이 만나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물결에 몸을 맡기면 모태처럼 아늑해진다. 긴장의 이완이 아니고 본질적인 질문에 맞닥뜨리는 원초적 생명력을 회복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느긋하게 심해를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단순 간결해지는 순간의 나를 발견한다. 영화를 통해 만나는 시간의 향기가 주는 선물이다.
『다가오는 것들』은 좋은 장면들이 보물창고처럼 그득하지만 느리게, 머뭇거리며 다가온다. 비범하고 깊은 순간들의 향기에 몸을 맡기는 일이 ‘무위의 철학’을 맛보는 것처럼 난해할 수도 있다. 영화를 본다는 것, 아니 한 편의 좋은 영화를 곡진하게 읽는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행위보다 황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실감한다. 가끔 세상에 태어난 축복을 느낄 때가 있는데 나에게는 영화와의 만남이 실낙원으로 가는 길을 인도한다. 물론 좋은 시나 소설, 책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이다. 이 둘의 관계는 에로스와 로고스의 만남이기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단지 격정적 감정의 파동이 주는 황홀을 즐길 수 있다는 예상치 않은 축복을 누릴 때 감격의 강도에 있어서 영화가 조금 높을 뿐이다. 인과관계의 노력에 비하여 ‘누린다’는 과분한 향유가 주는 의외의 기쁨 때문이 아닐까 싶다.
10여 년 즐겨듣던 슈베르트의 가곡이 있었는데 나는 그 곡명도 몰랐었다. 이안보스트리지가 부른 「물 위에서 노래함」이라고 알게 된 건 한참 후 얘기이다. 영화에서 이 노래를 새롭게 만난 것이다. 노래와 음악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기도 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음악 읽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곡명도 가사도 몰랐지만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깨끗한 것, 아름다운 것, 고귀한 것들을 떠올렸다. 그것들은 때로는 나의 슬픔을 어루만졌고, 분노를 잠재워주기도 하였다. 나탈리가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미래를 받아들이는 심리가 이 노래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불안과 위로, 영혼의 고양과 성숙한 인생의 순례자로서 나탈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나 또한 이미 음악을 들을 때쯤이면 내 안의 분노와 슬픔은 가라앉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음악을 통하여 깨끗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세상으로 나의 분노와 슬픔이 유영하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좋은 음악과 영화가 있지만 그것들이 내 안으로 스며들기까지는 특별한 인연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 인연을 맺기까지 나의 의지와 실천이 중요한 것이다.
40을 갓 넘은 나이였을 때 이런 편지를 쓰곤 했다.
“나는 이 순간부터 ‘행복’이라는 단어를 ‘의무’로 바꾸며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그 나이에 왜 그런 고백을 해야만 했을까. 돌이키면서 부끄럽기도 했고, 편지를 받은 사람이 감당했을 부담감 때문에 미안하기도 했다. 혼자서 쏟았던 눈물이 엄살을 부린 것 같아 창피하기도 했지만, 당시 절실함은 생애 최대치의 통증이었고 그 자각 이후 내 삶은 변곡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행복’을 포기하고, 생의 수수께끼를 ‘의무’로 풀어가고자 자각한 그 순간 더 이상의 헛된 희망에 매달리지 않고 온전하게 ‘내 앞의 생’에 충실할 수 있었으니.
그때는 몰랐다. 이후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이 얼마나 무궁무진할지, 당시 내가 만들어 낸 ‘행복’과 ‘의무’의 범주가 다양한 길 가운데서 아주 작고 초라한 길모퉁이 하나의 지점일 뿐이라는 걸.
다시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는 ‘행복’도 포기하지 못했고 ‘의무’는 더욱 난망이었다. 물론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다양한 길을 탐색했고, 새로운 길에서 만난 인연으로 내 삶은 왕성하게 물이 오르고 있다. 그 길 어디쯤에서 언젠가는 생명력의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으리라 기대한다. 삶은 행복과 의무라는 도식으로는 귀퉁이의 빈자리 한 구석도 채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40세의 나를 떠올리며 마음이 아팠지만, 회오리가 지나갔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파란만장한 풍파를 헤쳐 온 사람들 입장에서 영화의 주인공이 겪는 삶의 부대낌이 가볍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타인의 삶을 대할 때의 자세는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특별한 것임을 인정하는 관용이 중요하다. 스스로 그 무게를 감당하면서 품격 있게 자신의 길을 흔들리지 않고 걷는다는 건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일이다. 어려운 일이 닥치지 않으면 좋겠지만 이별과 늙음과 병과 죽음은 예기치 않게 우리를 방문한다.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지적 내공이 틈실한 나탈리는 50대의 고등학교 철학 교사이다. 연구와 강의와 집필을 겸하면서 주관이 뚜렷한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다. 나탈리는 젊어서 급진주의 사상을 지녔으나 지금은 아니다. 연금개혁을 반대하며 등교를 가로막는 시위주동 학생들에게 공격당하면서도 수업을 고수하는 평범한 교사에 불과하다.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토론을 인정하는 유연한 사고와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교육자로서 나탈리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며 살고 있다. 히스테릭한 모친이 자살을 시도하여 한밤중이나 강의 중이라도 달려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고 견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어려움이 닥칠 때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면 나탈리의 경우가 그렇다. 젊은 시절에는 세상의 변혁에 관심이 있었으나 이제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자신의 학생들에게 철학 교사로서 지행일치를 실천하는 것으로 관심을 제한하며 살고 있다. 가정과 학교의 테두리에 한정하여 자신만의 성을 성실하게 쌓아왔건만 막을 수 없는 것들이 밀려온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외도 고백과 별거와 이혼이다.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지만 나탈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모친은 고양이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비틀거리며 스스로를 비하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을 옭아매었던 상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지만 이제 그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무언가가 사라졌음을 아쉬워하고 불안함에 시달린다.
제자 파비앵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패기와 열정이 있다. 동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며 이상과 현실의 만남을 추구한다. 나탈리는 파비앵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스스로 자제하며 혼자만의 길을 고집한다. 파비앵의 공동체에 나탈리의 자리가 없음을 받아들인다. 나탈리는 지금까지 생활했던 공간에서 남편과 엄마의 부재를 극복하며 ‘자유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좋은 영화는 모험을 감수하는 스릴이 있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탐색의 시선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이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 또한 모험이리라. 『다가오는 것들』은 이 모험을 직설적으로 예고한다. ‘철학이 우리를 인도하리라’고.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리라’는 말보다 현실적이라 마음에 든다. 특히 상실감으로 고통받는 이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나탈리가 불안 심리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엄마의 고양이 판도라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달된다. 고양이가 내면에 감추어 둔 야성을 회복하듯이 나탈리도 자유와 행복을 회복할 것이라고. 영화에 등장하는 예술가와 철학가의 이름들이 많지만, 중요한 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연, 그리고 야성을 스스로 회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읽는다.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알며 정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적확한 판단이 서면 반드시 실천하는 삶은 알랭의 『행복론』을 강의하는 나탈리와 잘 어울린다. 교실에서 강의하는 나탈리의 음성으로 행복의 의미를 음미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환영의 매력은 그것을 준 열정만큼 지속된다.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라. 그는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