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참여예산 8천만원 시대, 행정 실무는 여전히 주민 몫… 충남도와 공주시의 제도적 책임을 묻는다
주민자치를 말하면서 정작 주민자치를 움직일 사람은 두지 않는다.
마을의 미래를 주민 스스로 결정하라고 하면서, 의제를 발굴하고 회의를 열고 사업을 집행하고 회계 서류까지 정리하는 일은 명예직 위원들의 봉사에 맡긴다.
이것이 오늘날 풀뿌리 민주주의가 마주한 불편한 현실이다.
주민자치를 제도화하겠다는 말은 거창하지만, 현장에서 일할 사람 하나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 제도는 무엇으로 움직일 것인가.
주민의 참여와 헌신만을 앞세우면서 행정적·재정적 책임을 뒤로 미루는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주민자치를 기대하기 어렵다.
박미옥 공주시의원이 던진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 꽂혀 있다.
박 의원은 지난 13일 공주시 월송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열린 충청남도의회 의정토론회 ‘주민자치, 시범을 넘어 제도로’에서 읍·면·동 주민자치회에 상근 사무국을 설치하고 인건비를 지원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충남도는 시·군이 공통으로 적용할 지원 기준을 마련하고, 공주시는 조례와 예산을 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단순히 인력을 늘려 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주민자치를 말로만 제도화할 것인지, 실제로 작동하는 제도로 만들 것인지 묻는 문제 제기다.
■ 예산은 늘었는데 일할 사람은 없다
공주시는 2025년부터 읍·면·동별 자치계획형 주민참여예산을 8천만 원으로 확대했다.
주민이 마을 의제를 발굴하고 사업을 계획해 지역의 변화를 직접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재정적 기반을 넓힌 것이다.
그러나 예산이 늘었다고 사업이 저절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주민 의견을 모으고 자치계획을 수립해야 하며 주민총회 준비와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여기에 집행한 예산의 증빙을 챙기고 회계와 정산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어느 하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업무다.
그럼에도 이 상당한 실무 부담을 명예직 주민자치위원들이 생업과 봉사를 병행하며 감당하고 있다.
예산을 편성하는 일과 그 예산을 제대로 집행하도록 지원하는 일은 별개다.
사업비를 확보해 놓고도 실무인력이 부족해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것은 주민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도의 설계가 현장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주민에게 권한을 주었다면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해야 한다.
책임만 늘리고 지원은 그대로라면 주민자치는 자율이 아니라 부담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주민자치위원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격려가 아니라, 주민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행정 시스템이다.
■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 이제 다시 따져야 한다
주민자치회 사무국 인건비 지원은 새로운 논의가 아니다. 현장에서는 이미 전문 간사와 운영비 지원의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공주시의회도 2025년 2월 사무국장 인건비 지원을 담은 조례 개정을 검토했지만, 당시 소관 부서는 법령에 명시적인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지원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15일부터 시행되는 개정 지방자치법 제17조의2 제9항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민자치회의 운영 및 기능 수행에 필요한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박 의원은 이 조항을 주민자치회 운영비와 인건비 지원의 근거로 해석할 수 있다며, 과거의 판단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정안전부의 주민자치회 참고조례 안내서도 해당 조항을 지방보조금을 통한 기본적인 운영비 지원의 근거로 해석할 수 있다는 취지의 안내를 제시한 것으로 설명했다.
물론 법 조항이 마련됐다고 모든 지원이 자동으로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관련 법령과 지방보조금 규정에 부합하는지 살피고, 지원 대상과 규모, 채용 방식, 회계 책임 등을 구체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법률 해석과 예산 편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필요하다.
하지만 법적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지원을 미뤄 왔다면, 법이 바뀐 뒤에는 달라진 규정을 토대로 다시 판단하는 것이 행정의 책임이다.
과거의 판단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적 환경에 맞춰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법은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지, 문제를 계속 미뤄 두기 위한 방패가 아니다.
■ 충남도는 기준을 세우고, 공주시는 실행해야 한다
박 의원의 제안에서 주목할 대목은 충남도와 공주시에 각각 구체적인 역할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충남도는 시·군이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사무국 운영과 인건비 지원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지원 대상과 인력 기준, 채용 절차, 보조금 집행 및 정산 방식이 제각각이면 지역별 격차가 커지고 행정 현장의 혼란도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재정 여건이 열악한 시·군일수록 인건비 지원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기 어렵다.
제도는 같아도 재정력에 따라 주민자치의 운영 수준이 달라진다면, 지역 간 격차를 줄여야 할 지방자치가 오히려 격차를 키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도비 지원을 포함한 현실적인 재정 분담 방안을 함께 논의해야 하는 이유다.
공주시 역시 충남도의 지침만 기다려서는 안 된다. 개정 법령과 관련 규정을 검토해 조례 정비의 방향을 마련하고, 실제 예산 편성으로 연결할 수 있는 실행계획을 준비해야 한다.
주민자치협의회와 읍·면·동 현장의 의견을 듣고, 어떤 방식이 지역에 가장 적합한지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공주는 도농복합도시라는 특수성도 있다. 16개 읍·면·동 가운데 10곳이 읍·면인 만큼 모든 지역에 똑같은 형태의 사무국을 설치하는 방식이 최선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동 지역은 상근 사무국을 우선 검토하고, 읍·면 지역은 여러 지역을 묶는 권역형 사무국이나 순회 간사 방식 등을 검토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조직 설치가 아니다. 각 지역의 행정 수요에 맞춰 실제로 업무를 지원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 주민의 봉사는 존중받아야지, 행정의 빈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
박미옥 의원은 공주시 주민자치협의회 초대 회장을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의 어려움을 제도 개선의 과제로 끌어올렸다.
주민자치 조직의 기반을 만들던 시절부터 체감했던 문제를 이제 조례와 예산으로 풀겠다는 것이다.
그는 “봉사만으로 주민자치회를 이끌기는 어렵다. 봉사하는 위원 곁에 상근으로 함께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주민자치 현장의 현실을 압축한다.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는 주민자치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자발성만으로 전문성과 지속성을 모두 확보할 수는 없다.
주민의 열정에 의존해 행정업무를 무한정 떠넘기는 방식은 결국 소수의 헌신적인 주민에게 부담을 집중시키고, 참여를 지속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주민자치는 주민이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는 제도가 아니다. 주민이 지역의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며, 그 결정이 실현될 수 있도록 행정이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협력 체계여야 한다.
위원은 주민의 뜻을 모으고 방향을 결정하며, 전담 인력은 실무를 지원하고, 행정은 제도와 재정을 뒷받침하는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주민의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주민자치의 실행력을 높이는 길이다.
■ 주민자치의 진짜 시험대는 조례와 예산이다
이제 충남도와 공주시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주민자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언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지원 체계를 마련할 것인가.
충남도는 법률 개정 취지에 맞는 공통 기준과 재정 지원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공주시는 주민자치 현장의 요구를 수렴해 조례와 예산에 반영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지원의 범위와 재원, 인력 운영 방식에 대한 검토 결과도 현장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상근 사무국 설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인력 운영의 효율성, 예산의 지속 가능성, 회계 투명성, 성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확보해야 한다.
그렇기에 더욱 명확한 기준과 책임 있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필요한 지원을 계속 미룬다면 주민자치는 언제까지나 주민의 희생에 기대는 제도로 남을 수밖에 없다.
주민참여예산을 확대하고 주민의 권한을 강화하겠다고 했다면, 그에 걸맞은 행정적 기반을 갖추는 일도 정책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민자치는 주민에게 일을 맡기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주민이 결정한 일을 끝까지 실현할 수 있도록 제도와 사람이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박미옥 의원의 제안이 또 하나의 토론회 발언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제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이다. 충남도의 공통지침, 공주시의 조례 정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예산이다.
주민자치를 하라고 하면서 일할 사람은 두지 않는 모순. 그 모순을 바로잡는 것이 풀뿌리 민주주의를 살리는 첫걸음이다.
